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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천일은행일사 (大韓天一銀行日史)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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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연도 1959년 10월
출판사 한국상업은행행우회
판매가격 15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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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천일은행 (大韓天一銀行)


상업은행의 전신으로 1899년(광무 3) 1월에 설립되었다.

발기인은 31명으로 대한제국의 고급관료였던 심상훈(沈相薰)·민병석(閔丙奭)·민영기(閔泳綺)·이근호(李根鎬)·이용익(李容翊)·조동윤(趙東潤) 등이 포함되었다. 투자가는 김두승(金斗昇)·김기영(金基永)·송문섭(宋文燮)·정영두(鄭永斗)·박경환(朴景煥)·조진태(趙鎭泰) 등 고급관료층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상인층이었다. 초대 은행장은 민병석이었고 부은행장은 이근호였다.

처음에 공칭자본금 5만 6,000원과 불입 자본금 2만 8,000원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자본금의 불입이 여의치 못하여 국고금 5만 원을 5년 상환기간으로 대여받았다. 이로 인해 1902년(광무 6) 3월 은행장이 영친왕(英親王)으로, 부은행장이 이용익으로 바뀌었고 은행의 성격도 황실과 깊이 연관된 정치색을 띠게 되어 특수은행의 성격으로 바뀌었다. 1905년 금융공황과 더불어 자본의 약소성과 자체 경영상의 실패로 1년 동안 휴업상태에 빠졌다.

1906년 6월 자본금을 15만 원으로 증자하고 취체역에 김기영·윤정석(尹晶錫)·조진태·백완혁(白完爀)을 선출하여 경영을 관료중심에서 상인중심으로 바꾸었다. 이는 은행에서 황실의 세력을 배제하는 것이었지만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를 통해 정부로부터 25만 원의 자금을 무이자로 받게 됨에 따라 일인세력의 간섭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메가다, 이즈미 등이 상임감리자로서 경영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게 되었고, 한일합병 후 일본은 이(李) 왕가와 은행 간에 맺어진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하고 '대한'이란 용어를 폐기시켰다.

1911년 상호를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꾸면서 경영은 완전히 일인세력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