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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尹拯]
1629(인조 7)∼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파평(坡平). 자 자인(子仁). 호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 문성(文成). 조부는 팔송 황(煌)이다. 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윤휴(尹鑴)·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박세채·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에서 실증되고 있다. 그것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그가 스승인 송시열에게 보낸 신유의서(辛酉擬書)에 의하면 스승을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 비판하여 배사론으로 지목받았고, 송시열의 주자학적 종본주의와 이에 근거한 존화대의(尊華大義) 및 숭명벌청(崇明伐淸)의 북벌론을 정면으로 반박,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을 이루었다. 그의 아버지인 윤선거 비문 찬술 시비와 더불어 신유의서의 작성으로 노소당인 간의 격렬하게 전개된 회니시비는 송시열과 윤선거 부자가 모두 죽은 후에도 더욱 격렬하여 노소당인들이 대립되었던 17세기를 넘기면서도 끝을 맺지 못하고 경종·영조·정조 대에 해당되는 18세기 노소당론으로 넘겨졌다. 그는 어진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홍주의 용계서원, 노성의 노강서원 등에 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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